고촌 양의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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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양육

금주의 말씀

20260525 | 히10:1-18 | 새언약에 기대어 살자

새언약에 기대어 살자
1) 오늘 10장은 9장23절부터 이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의 우월성을 다루는 마지막이자 7장부터 이어진 긴 논증인 ‘멜기세덱 반차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 사역과 새 언약의 성취’라는 대논증의 마침표를 찍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19절부터 히브리서 마지막까지 성도들의 실질적인 삶과 인내를 촉구하는 ‘권면과 적용’의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올해 ‘서로 돌아보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라는 표어가 여기 권면의 시작부에 있음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잠시 흐름의 이해를 위해서 9장 초반부에는 땅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를 대비하면서 성소 뿐만 아니라 23절부터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속죄가 매년 땅에서 드리는 인간 대제사장의 속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단 한 번’ 드려진 그 효력이 영원하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잘 알던 구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라는 구절은 보편적 인간의 죽음과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신’ 대속적 죽음이라는 차이였습니다. 이해를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뻔히 죽음을 알면서도 생명의 가치를 보편적 실현으로 살아내는 의로운 분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2) 이제 1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말하면서 올 좋은 일을 ‘참 형상’이라고 대조하는 구조입니다. 1-4절까지 말씀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를 충분히 논증했습니다. 이제 제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율법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라고 시작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체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1절을 직역하면 Σκιὰν γὰρ ἔχων ὁ νόμος (Skian gar echōn ho nomos): ‘왜냐하면 율법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로 시작해서 τῶν μελλόντων ἀγαθῶν (tōn mellontōn agathōn): ‘장차 올 좋은 일들’이 실체이고 실체가 드러나면 그림자가 주던 모호함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이 된 상태입니다. 로마서 10:4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3) 당시 히브리서 기자가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피비린내 나는 제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생 그 제사를 보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매일 드리는 그 제사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던진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여러분, 모델하우스가 아무리 화려해도 진짜 집이 지어지면 모델하우스는 철거하지 않습니까?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왜 여전히 그림자만 붙잡고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4) 이해를 위해서 다시 눅15장의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들이 아닌 종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을 반지를 키워 줌으로 확인시키고 새 옷을 입혀 줌으로 수치심도 가려 줬습니다. 이 비유의 진짜는 오픈 결말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잊어버림에 대한 시선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이 온맘으로 잔치에 참여했을까하는 ‘나 같으면’에 질문입니다. 결국 진정한 참여는 아버지가 죄를 완전히 잊어버림과 직결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은 첫째 아들처럼 율법을 지켰다고 스스로가 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거 했으니 나는 잔치를 누릴 자격이 있어 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조건 없는 용서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잘못을 한 적이 없거든 하는 철저한 자기 의라는 성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죠. 혼자 일때는 작동하지 않다가 동생이 돌아와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잔치가 벌어지니까 잔치 안에 참여하지 못하고 문밖에 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5) 성경의 특이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시편 기도자의 시간으로 가보면 주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기다리면서 부르짖었고 주님은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주셨다, 안전하게 해주셨다고 고백하면서 베푸신 감사를 새 노래로 부르며 이제 주님의 뜻을 순종하겠다라고 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들려 주시면서 제사와 제물,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루마리 책’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기다림과 부르짖음 그리고 건져주심과 감사의 과정을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구나 하는 경험을 고백합니다. 어떤 경험이냐면 제사, 제물, 번제, 속죄제와 같은 외형으로는 깊은 웅덩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실체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8절에 주의 뜻을 행하는 것,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서 숨기지 않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이미 1년 동안 소선지서를 살핀 우리가 모른다 할 수가 없고 지난 주에도 호세아서에서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가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결코 외형적인 제사만 가지고는 마음의 죄사함, 죄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정교한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그 넘어’까지 볼 수 있는 믿음이 작동하고 그 결과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의 한 구석이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한 유목사님의 사모님께서 그제 소천하셨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과연 기도의 열매는 무엇인가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겹쳤습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과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사모님의 영원한 안식이 다행이라는 생각 그리고 무엇인가를 바라면 기도했던 교회도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결국 길을 잃은 것이죠. 그러면서 고통 받는 우리 모두가 깊은 웅덩이에 쉽게 빠지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6) 우리는 누구나 시편 기도자처럼 깊은 웅덩이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통해 건져냄을 받은 시편 기도자의 고백이 히브리서 기자에게 ‘등대’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도 히브리서의 말씀이 ‘등대의 빛’이 되는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는 우리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실체로 오신 준비 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면서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신 것’을 바라보자고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어떻게 ‘이 말씀이 그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바로,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7) 말씀을 들음이 ‘오늘 내가 살아 온 삶을 말씀에 붙여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참회기도를 넣었습니다. 지난 한 주 스쳐지나간 순간에 ‘아 감사하다’라고 했던 순간이 있는지 ‘아 잘못했구나 이렇게 할 걸’ 했던 순간이 있었는지 말씀이 내 삶에 경고등으로 작동을 했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말씀을 붙잡고 자신과 처한 시대 속에서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삶으로 구체화 한 것처럼 우리도 다시 오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내 삶에서 꺼진 신호등이 아니라 파란 불, 빨간 불이 들어오는 작동하는 신호등처럼 뜻하심에 따른 파란 신호에 감사하고, 내 마음의 욕심을 따라 행한 빨간 신호에는 멈춰 서서 주의 말씀으로 인도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이 작동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이 작동하는 상태를 10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위한 두루마리’로 깨달으면서 머리에 넣으려고 애쓰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니다. 마음에 이미 있다. 그런데 마치 빨대가 음료수의 얇은 막을 통과하고 입으로 들여 마시고 맛보고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흘러가듯 삶을 흘려보지 말고 순간마다 말씀이 작동하도록 ‘거룩한 상태’임을 다시 되새기는 것입니다.
8) 저는 히브리서를 설교하며 두어 차례 소방관과 의인이라 부르는 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지는 그분들이 죽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행동하는 의지적 삶과 이들 마음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생명의 고귀함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러 그들도 그러한데 세상 죄를 지고 단번에 자신의 목숨을 드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떠한가 하는 묵상입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는 용골과 뱃머리의 돛 그리고 방향을 결정하는 방향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소방관이나 의인들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살고, 위험에 노출되어도 반드시 구하러 올 것이라는 믿음이 요즘처럼 자기 이익에 미친듯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살맛난다 하면서 방향을 정하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살기 위한 노동 행위를 얻기 위한 행위로 바꿨습니다. 그들이야 그 이익으로 살맛난다 하겠지만 잠시 뿐입니다. 위험의 순간 그런 이익은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속죄의 피로 말미암에 신자는 ‘살게하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는 살게하는 힘을 공급 받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9) 이제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면서 다시 한번 제사가 죄를 없앨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죄를 사하심, 단 번에 영원히 유효한 제사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표현은 앞서의 긴 논증을 정리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오실 날을 심판의 날로 바라 봅니다. 마치 시편 기도자가 어렴풋 메시야를 소망했던 ‘새 노래’를 히브리서 기자는 심판의 날을 가리키고 확실한 증거로 ‘새 언약’을 꺼냅니다. 성령께서 도장을 찍은 새 언약은 앞선 논증들의 확실함을 못박습니다.

10) 그래서 16절 ‘이것이 언약이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언약의 문서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마음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31:33–34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는 말씀에 근거해 ‘내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박아주겠다, 그들의 생각에 새겨 주겠다, 죄와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라고 명시적으로 선포합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삶은 거룩한 삶과 같은 표현입니다. 마음에 새겨진 새 언약(디아데케)은 양자 간에 동등한 계약이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죄와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는’ 일방적으로 유효하게 하시는 ‘은혜의 유언적 언약’입니다. 8장에서 ‘새 언약의 절대적 은혜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11) 17절에 사용 된 ‘우 메’는 결코 ~하지 않겠다는 가장 강력한 이중 부정으로 흔히 우주가 두쪽이 나도 절대 기억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지 않겠다는 ‘므네스데-소마이’는 미래 어느 시점에서도 죄와 불법을 소환하여 심판의 근거로 결코 삼지 않겠다는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12)이어 18절에 이것들을 사하였다는 의미는 (아페시스) 죄를 멀리 보내다. 빚을 탕감하다는 철저한 용서로 이제 더 이상(우케티) 죄를 위한 예물, 제사가 없는 시간적, 존재론적 종말을 선언합니다. 특히 18절문장은 ‘동사’가 생략된 명사 문장으로 완료적이고 의도적으로 격언을 표현할 때 처럼
‘죄 사함이 완료. 그러므로 더 이상 제사 없다!’ 라고 끝을 맺습니다.
13) 고통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산 소망을 바라봄도 필요하지만 바라봄을 통해 각자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위로의 명언이 아니라 곁에 있어 줌으로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날 때까지 우리 역시도 곁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를 공급하심을 굳게 믿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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