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1편 / 없음을 있음 같이 사는 신자
다윗의 시는 138편 믿음으로 시작해서 139편에 아시는 주님 그리고 140편에서 애원하는 간절함의 기도로 연결된다. 141편 시작을 ‘내가 주님을 부른다’고 시작한다. 부름과 임재 그리고 응답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바람’이고, 2절 기도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저녁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보자. 우리는 언제든 기도한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성전 없음’은 단순한 허전함이 아니다. 성전에서 아침과 저녁에 성소 안 분향단에 향기가 올라간다. 이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를 구현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1-2절은 성전이 없음을 있음 같이 살고자 하는 간절한 간구이다.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그렇다. 그렇다면 그의 간구는 무엇일까? 3-4절에 ‘입에 파수꾼,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와 4절 ‘악을 행하는 자들과 행하지 말게 하심과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시편 19:14 “...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신자의 삶의 형편은 말에 있다. 주문처럼 달고 사는 ‘주님’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파수꾼과 문지기가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을 통해 악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간구한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라고 하셨다. 입을 지키는 것은 생각과 육체를 동시에 지키는 상호 밀접한 것이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렘1:9)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다.(시119:11)
그런 기도자가 5절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라고 고백한다. 먼저, 좋은 말은 누구나 좋아한다. 그렇지만 의인의 말, 교훈, 책망은 듣기 싫어한다. 여기에서 신자의 삶이 보인다. 책망을 들을 때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그러한지를 생각한다, 판단한다, 숙고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원문을 직역하면 ‘의인이 인애로 나를 친다’인데 후반절에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한다’는 표현이 ‘이유’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입이 말과 먹는 기능을 할 때, 흔히 험한 말은 쉽게 구별이 된다. 그러나 교훈과 책망은 말로는 좋아도 말하는 자의 문제는 다르다. 마치 욥에게 찾아와 친구로 맞는 말을 하면서도 그들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도 기도자는 말은 교훈과 책망으로 여기고 사람에 대해서 기도하는 왜냐하면 3절에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6절에 ‘재판관’으로 연결된다면 말과 행동이 다른 그래서 기도자가 고통받는 상태를 벗어나는 간구로 연결해 보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듣는다’는 표현은 그들과 달리 지켜진 입의 말은 듣는 자들도 아는 사랑스러운 말이기 때문이다.
7-10절은 시인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무덤으로 사용하는 산이 있고 넓다. 그 길로 난 등산로를 걷노라면 길과 구분되지 않는 무덤들이 많다. 관리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새겨진 비석의 글도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마치 해골이 흙처럼 부스러져 흩어진다는 7절의 말처럼 말이다. 그런 인생에 참된 안식처는 어딜까? 기도자는 ‘주께 피하오니’라고 간구하며 그런 인생의 모습으로 ‘버려 두지’ 말라고 간구한다. 그런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잡고 잡히는 세상에 놓여 있다. 포식자가 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입’을 지키지 않으면 포식자의 삶이 된다.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 입으로는 교훈을 쏟아내고 판단하는 삶은 포식자의 삶이고 시편은 이를 악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언제나 올무를 놓는다. 앞서 140편에서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간구했다. 예수를 잡으려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딱 맞는 자들이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게 하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것을 사냥하여(책잡으려고) 그를 상대로 덫을 놓고(혈안이 되어 노리고)’(눅11:53-54) 이다. 시편 56:5 “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여기 곡해하다는 의미가 왜곡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그 길로 가려하고 이기려 한다. 하지만 기도자처럼 ‘함정에서 벗어나게’, 도리어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입으로 악독을 쏟아내는 그들의 입에 칼이(시59:7-8) 있음을 두려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거짓을 말할 때마다 이는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라고(요8:44)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없음 천지다. 갈급의 상태로 산다. 그렇기에 우리는 갈급한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맞아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갈급은 기도자의 간구로 우리를 인도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빈 공간이 있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기도자는 없음에도 하나님의 있음을 깨닫는 의인의 길을 간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