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촌 양의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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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양육

시편 묵상

A4_한장으로 시편 140편

주님께 맡겨진 기도

다윗은 도움을 구한다. 어떤 기도자보다 간구를 잘 한다. ‘날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2)로부터 ‘건져 주시고, 보호해 달라’고 시작한다. 그들은 악을 계획하고 뱀처럼 날카로운 혀를 가진 자들이다. 포악한 자(4)이기도 하다. 오만한 자(5)이기도 하다. 139편에서 ‘아시는 주님’을 노래할 때 마지막에 등장한 원수이다. 그때 기도자는 ‘죽여달라’고 부르짖었다. 악인의 포악함이 극에 달할 때 기도자는 복수를 원했고 이제 140편은 다양한 표현으로 말한다. 간절하다. 6절에 ‘나의 애원하는 소리’는 절실하게 울부짖는다는 의미다.

그들의 생각처럼 되지 못하게 해달라. 계획도 실패하게 해달라, 승리하지 못하게 해달라, 재앙을 내려달라. 숯불이 그들 위에 쏟아지게 해달라, 불구덩이나 수렁에 빠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달라’는 보복을 넘어 저주처럼 들리는 기도이다. 모든 중심에 6절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간절함과 강도가 높은 기도이다. 마트 바닥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며 떼 쓰는 아이처럼 보인다. 그렇다. 기도는 격식의 언어가 아니다. 말을 잘하는 훈련이 아니다. 기도는 들어주심을 믿기도 하지만 오히려 들어주시도록 부르짖는 행동이다. 마치 타인에게는 술 취한 몸부림처럼 보이는 한나의 기도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부르짖음과 감사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마트에서 떼를 쓰는 광경은 유사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진 후 태도의 돌변이 없다. 한나의 감사는 ‘자녀주셔서’라고 하지 않았다.

기도자는 그렇게 부르짖는 결과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있다. 12절 변호해 주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분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13절 의인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함께 살 것이라고 고백한다. 반면, 우리의 기도는 들어주실 때까지 하는 기도에 함몰되어 있다. 흔히들 저 어디쯤 나라 예를 들면서 기도가 100% 응답받는 이유가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치성적 기도’를 인용한다. 흔히 ‘치성수 기도’라며 물 한 잔 떠놓고 올리는 어머니의 기도에 비유한다. 맞지 않다.

139편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상황을 말했다. 포로에서 돌아온 시기, 초라한 지금의 상황 그래서 적들이 난무한 상태에 각자 도생의 시기를 살 때, 그들은 어디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그렇다고 다윗의 영광으로 회복 되었는가? 비록 다윗의 시를 묶어 노래하면서 마음으로는 다윗의 부국강병한 나라를 꿈꿨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아기의 울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옳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향을 보는 나침반이다. 기도할 때 본다/안다. 의의 길로 방향을 틀게 한다. 왜냐하면 악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악을 미워하니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알게 된다. 우리는 저주를 퍼붓고 싶은 입을 가지고 있다(141편). 죄의 부패성이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받아 주신다. 보복의 언어로 가득차 있지만 복수에 대한 실행자가 기도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넘겨 주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이다. 그래서 기도자의 마음에 정의와 공의를 열망하게 된다.

‘하나님께 맡겨졌다’

돌아보자. 얼마나 맡겼는가? 맡겼다고 말은 한다. 아이가 떼를 쓰고 얻은 것을 부모가 들어준다. 바로 이때 아이의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이제 맡겼으니 잊어버리고 앞을 보고 손 잡고 똑바로 걷는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기도에 대한 말이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부모가 아니라 얻은 ‘그것’에 시선이 있다. 부모가 잘 들고 있는지 마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인냥 누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앞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손에 자신이 맡겨진다. 그러니 발은 걸려 비틀거리지만 시선은 그것에 집중된 것이다.

부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지만 내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기도다. 13절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주의 앞에서 살겠습니다’는 고백이 그렇게 나온다. 140편은 편안할 때의 기도가 아니다. 모든 기대와 소망이 사라져 갈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이 땅에서 어떤 도움도 없을 때 아버지 집으로 돌이키는 탕자의 기도이다. 거기가면 살겠다는 소망보다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길을 떠나 가는 길에서 죽겠다는 마침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기는 아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죽어야 다시 사는 길’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변으로부터 억울함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을 때 부조리한 세상에서 주님 앞으로 나가자. 그리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며 올바른 길을 바라 보자. 이것이 정직의 길이다. 주님께 맡겼다면 없었던 일이 아니라 맡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계속 경험하자. 그래서 주님 앞에서 ‘샬롬’을 이루고 ‘만족’을 경험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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