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 / 아시는 하나님
지난 주부터 다윗의 시를 본다. 시편이 끝나는 즘에 왜 다윗 시의 묶음인가? 분위기를 이해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결국 회복을 위한 길이지만 고난이 따른 포로 시기 70년을 겪었다. 돌아온 이스라엘은 예전의 영광은 없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노인들은 지난 영광과 돌아온 이스라엘의 초라함으로 울었다. 그런 시기에 다윗의 시편을 묶어 공동체가 기도한다.
그렇다면 다윗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며 그때로 돌아갈 소망으로 보이지만 막상 화려한 성전이나 그때의 ‘좋았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함’의 어떠함을 기도의 핵심으로 삼는다. 138편은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해도’ 였다. 그리고 구원해달라는 요청 더 나아가 버리지 말라는 눈물의 호소를 다윗의 노래로 가져온다. 이제 139편의 중심에는 ‘아시지 않습니까?’(1, 2, 3, 4, 14, 23)라는 연결음이 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다고 노래한다. 그런 하나님과 ‘여전히 함께 있다’(18)는 고백 후 ‘악인을 죽여만 주신다면’이라는 매우 강한 간절함은 앞서 ‘고난의 길 한 복판’의 성격이 어떠한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악인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들이고 나는 주님께 속했기 때문에 따라서 그들과는 원수의 관계라고 말한다. 그런 자신을 ‘샅샅히 살펴보시고’,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알아 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24절에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는 1편에서 ‘의인과 악인의 길’을 떠오르게 한다.
다윗은 왕이었다. 누구보다 잘 나갔다. 전쟁에 능한 자, 정치에 능한 자 등 어떤 수식어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삼상13:14절에 사울 왕을 폐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지도자로 삼겠다’ 할 때, 행13:22절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이라고 했다. 특히 마음에 해당되는 ‘카르디아’는 인간 내면적 중심을 말하며 ‘내 뜻을 다 이룬다’와 연결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수행’과 연결된다.
고난의 시간에 그 어떤 소망보다 큰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다. 우리는 다윗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으로 삶을 살아낸 대표적인 인물이면서 나아가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구속사적 구조에서 읽어야 한다. ‘내가 다윗처럼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하는 소망이 다시 오실 메시아의 소망으로 연결되는 간절함이 드러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11:1),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겔34:24) 그리고 마침내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눅1:32) 우리는 그렇기에 계시록에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 광명한 새벽 별’(계22:16)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마음에 바라는 바 ‘다윗처럼’이 ‘메시아’에 대한 고대하는 간절함은 139편에 ‘모든 걸 아시는 주님’으로 연결된다. 다윗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같은 목표이자 바람이다. 하나님은 기도자를 ‘아신다’ 우리는 ‘나를,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을 안다’ 상호적 관계의 앎 그럼에도 먼저 나를, 우리를 알아 주신 놀라움을 고백한다. 우리는 ‘모른다’에 갇힌 사람이다. 아이도 ‘엄마는 내 마음 몰라’, 부부도 상대에게 ‘당신은 내 마음 몰라’, 연인도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라고 한다. 세상천지 내 마음 하나 알아주면 간, 쓸개도 주겠다 한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 속은 모른다’ 했다.
하나님은 ‘아신다’ 지식적 앎이 아니다. 단순히 경험적 앎도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앎이다. 그래서 하늘, 스올(죽음의 세계), 바다, 흑암으로 도망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반대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다만 기도자는 피하는 것과 함께하는 것 사이에 있다. 이것이 14절 ‘기묘하심’이다.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선다. 다윗이 찰나의 순간에 범죄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때,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올린 그 찰나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속속들이 아셨다. 그래서 둘은 같다. 이는 14절 기묘하심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자는 13절 장기를 지으신 것, 모태에서 나를 만드신 것과 같은 기이함을 내 영혼은 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는 영역은 확장되어 16절 생명의 신비까지도 알게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본질,본체)이다. 하나님을 알 때 즉 믿음이 발현되어 보지 못하는 세계를 안다/본다이다. 그러므로 기도자가 악인의 멸망을 구하며 그들을 원수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다. 이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메시아 시대를 고대하는 기도자의 마땅한 영적 태도다. 그들의 ‘원수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다. 우리는 상황의 개선, 급한 일의 처리가 늘 주님보다 앞선다. 그러나 다시 알자.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살피신다. 그렇기에 실족하지 않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24)하여 주신다. 그러하신 하나님과 오늘도 우리는 함께한다. 동행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