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이루신다는 믿음
138편부터 145편은 보편적으로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이며 감사와 찬송 그리고 아픔을 노래한다. 2권에서 우리는 다윗을 만났다. 그의 언어는 ‘감사’, ‘하나님의 이름’, ‘헤세드’, ‘성실’, ‘간구’, ‘구원’, ‘지으심과 행하심’과 같은 단어들이다. 그렇기에 138편은 낯설지 않다. 1절 ‘찬양’, 2절 ‘경배’, ‘인자하심’, ‘진실’, ‘주님의 이름’이 그렇다.
우리의 삶에는 이런 단어가 뼈와 살에 새겨져 있는가? 어떤 단어들이 나를 대표하고 있는가? 삶의 현장에서 세상 악다구니로 살았던 험한 언어들이 입을 가득 채웠는가? 주의 성전에서 쏟아내고 주님과의 언어로 채웠는가? 누군가 대화하다 보면 ‘또 그 소리 한다’하는 그 단어, 말이 나의 언어다. 늦지 않았다. 후히 주시는 그분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학자들은 5권이 포로기 이후에 선별된 시편이라고 말한다. 다윗의 노래가 여기에 모음처럼 있는 이유는 인간이 겪는 고뇌와 번민 그리고 좌절과 고통은 배경을 달리할 수 있지만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떠했는가는 25년 1년동안 ‘소선지서 설교’를 들은 이들은 어렴풋 기억을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느헤미야를 읽기를 바란다.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성전 터를 짓고 그전에 웅장했던 성전과 초라한 그저 성전 터를 보면서 한편으론 기뻐하면서도 대성통곡했던 할아버지와 그걸 모르는 포로 세대의 아픔, 살기 위해 세상 ‘왕들(4)’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에 그들은 기뻐하고 싶었지만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속에선 과거의 노래가 현실을 살아내는 유일한 통로이자 남아 있는 유산이었다. 다윗의 감사를 빌려, 다윗의 찬송을 빌려 오늘의 고단함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 ‘시편적 인간’의 모습이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 하며 응답하신(3) 하나님을 다시 고대하는 이들의 노래를 우리는 깊이 체험해야 한다. 계속해서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정말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서 누군가 힘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라 거칠게 자라는 엉겅퀴를 제거해 주셔야 살아낸다.(6) 왜냐하면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기’ (7) 때문이다. 이런 삶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자 시편이 말하는 ‘의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말씀의 풍족함을 따라 사는 것이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말씀은 두 가지 복으로 ‘바라크’, ‘아쉬레’로 나타난다. 시내를 따라 흐르는 물은 우리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제공한다. 처참한 포로 이후의 삶에서 이들이 먹는 것은 다윗이 경험했던 헤세드와 에메트이다. 말씀을 떠 먹는다. 그래야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삶을 자신할 수 있는가? 문을 나서며 무너지지 않고 온전하게 다시 돌아와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 만지고 경험할 자신이 있는가? 어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겠는가? 당연함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이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우리에게 ‘바타아네이’ 즉, ‘그리고 당신이 내게 응답하셨다’는 열매를 맺는다. 이를 구체적으로 6절에 ‘멀리서도 오만한 자를 다 알아본다’는 말에 있다. ‘아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위로’다. 헤세드하신 하나님이, 에메트하신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1편에도 ‘의인의 길을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같은 말이다. 아시기 때문에 의인은 복으로, 악인은 심판으로 열매를 맺는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변명할 필요도, 억울함을 토로할 필요도 없는 상태 7절에 ‘고난의 길을 걸어도… 나에게 새 힘을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 갚아주신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아셨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따르는 열매가 그 자리에서 맺었다. 이들은 다윗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아심’을 고백한다. 세상은 불의했다. 그런데 그들은 불의한 길을 따라 살다가 포로가 되었고 그럼에도 돌아오는 기회를 받았다. 말 그대로 ‘환난의 한가운데를 걸었다’ 다윗은 자신의 음욕이라는 불의에 빠졌고,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버리는 불의에 빠졌다.
오늘 우리는 어떤 불의에 빠지는가?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아심’을 경험하는가? 바울의 고백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빌1:6)하는가? 하나님의 손(7,8)은 ‘펴신다’, ‘구원하신다’ 그리고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으신다. 포로 이후 돌아온 초라한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고백은 여전히 결핍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상으로 채울 수 없는 유일한 채움이다. 겨우 태양의 빛 1%가 지구 70억 인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헤세드와 에메트의 능력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8절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목적을) 이루시리이다’ 라고 믿고 고백해야 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