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촌 양의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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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A4_한장으로 시편 137편

어! 어디선가 들었던 노랜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137편 / 만족해하다. 하나님의 정의를.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울었다." 시편 137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며 '바빌론'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암울했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치 우리가 '일제강점기'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시기적으로는 포로 귀환 즈음으로 보이지만, 기도자에게 '바빌론의 완전한 멸망'은 아직 희미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앞선 135편, 136편의 장엄한 감사 찬양과 이 137편의 처절한 분위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주 시편 136편을 통해 일상의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을 감사하자고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 평안한 감사에서 우리는 갑자기 유배지로 곤두박질친다. 사람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상황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극심한 감정의 동요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태도를 바로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고통이 닥칠 때는 평안을 간구하고, 깊은 탄식이 터져 나올 때는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느냐"며 자신을 다그치기도 한다(시 41, 42편). 참혹했던 포로기를 기억하며,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재주를 잊을지로다"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을 정도의 깊은 고뇌가 이 시편에 담겨 있다.

바빌론은 기도자 개인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가장 암울했던 무덤이다. 강변에 앉아 고향 시온을 생각하며 울 때, 원수들은 유희를 위해 수금을 켜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불러보라고 조롱하고 강요했다. 나 혼자 당하는 고통도 버거운데,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능욕을 당할 때 그 고통은 배가 된다.

이쯤 되면 인간은 타협의 유혹을 받는다. 그만 저항하고 이 땅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어느 정도 평안을 얻겠지만, 결국 하나님을 잊게 된다. 바빌론 포로 생활은 70년이었지만, 과거 애굽에서의 삶은 430년이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면서 서서히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렇기에 기도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바에야 수금을 타지 못할 손, 노래하지 못할 혀를 가진 쓸모없는 자로 버려지기를 자처하며 스스로에게 저주를 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세상의 돼지우리에 던져져 이름만 남았던 둘째 아들처럼 말이다. 기도자의 철저한 자기 고뇌와 결단은, 이 유배 생활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임을 뼈저리게 인식한 데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기도자는 가슴 깊이 묻어둔 처절한 복수심을 꺼내놓는다. 먼저는 에돔을 향해서다. 이스라엘이 함락당할 때, 형제 국가였던 에돔의 배신은 뼈아팠다. 넘어질 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헐어 버려라, 기초까지 다 부숴버려라"고 조소했던 그들의 악독함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원흉인 바빌론을 향해서는 "네 어린아이들을 바위 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보복의 감정을 쏟아낸다.

복수는 분명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복수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내 안의 감정마저 깨끗이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미움과 분노가 끓어오를 때, 시편은 우리에게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날것의 감정을 남김없이 쏟아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종종 얄팍한 경건의 모양이나 유교적인 체면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조차 분노를 숨기려 든다. 그리고 정작 해소되지 않은 그 억압된 화살을 만만한 교회 공동체의 약자들에게 돌리곤 한다. 감정은 쏟아내지 않으면 결코 온전히 해소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날이 선 137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시편의 흐름에서 뒤쪽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수금과 노래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바빌론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시편 1편에서 선포된 '복(아쉬레)'이 이 잔혹한 137편의 저주 속(8~9절)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만족은 엄마 품에 잠든 아이처럼 그저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진정한 '아쉬레(복)'는 바빌론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세워지기를 열망하는 바른길(義)에 서는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바빌론'이 있다. 어떤 이는 지금 그 강변에서 울고 있고, 어떤 이는 그곳을 간신히 벗어났지만 여전히 곁에서 조롱하는 에돔과 바빌론에 둘러싸여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아쉬레(행복)'한가?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가 '바라크'라면, '아쉬레'는 환난 속에서도 올바른 길, 정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자가 누리는 단단한 복이다. 137편의 기도자가 쏟아낸 거친 저주는, 단순한 사적 복수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철저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온전한 고백이자 깊은 통찰이다.

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정의에 온전히 만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요동치는 감정을 넘어 나와 이웃의 샬롬(평안)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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