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촌 양의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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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

A4_한장으로 시편 143편

시편 143편 /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기도를 들어 달라고 시작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탄원이다. 이런 탄원은 140편부터 있고 다양한다. 다만 2절과 12절에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표현은 시편의 전체 그림을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구조가 개인적 탄원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왕을 의미하는 제왕시와 지혜시의 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편을 꾸준히 읽고 먹고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다.

아직도 기도를 나의 필요를 아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다시 1편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 ‘종은’ 왕과 대비된다. 이어지는 144, 5편이 왕의 시와 지혜시로 구성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쉬운 이해로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기도’를 한다.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가 내 기도를 -타인을 위한 것이라들어 달라는 일방적 ‘비는 행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기도는 나침반과 같다. 진북 방향을 알기 위해 손 위에 올려 놓는다. 그때 바늘은 흔들리지만 이내 안정되면서 진북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체에 북 방향을 바늘에 맞게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지도 역시 진북 방향에 맞게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윗의 탄식은 흔들리는 바늘이 진북을 가리키도록 한다. 혼란한 시기에 공동체가 다윗의 탄식시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먼저 맞춘다. 보기에는 흔들리는 것 같아도 변함없는 진북을 찾는 것이 개인의 탄식이다. 나의 탄식에 앞서 평생을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 한 흔들리는 바늘 다윗의 기도를 함께 고백하는 이유다. 140편부터 다윗 개인의 탄식 기도를 통해 공동체 각자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맞추고 있다. 143편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대답해 달라고 간구한다.

여기에서 바로 ‘비는 것’과 ‘진짜 기도’의 차이가 있고 다윗은 알았다. 응답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 ‘의로우심’이 매우 중요하다. 일방적인 ‘치성’이 아니다. 정성을 들여 하늘을 움직이는 무속적 행위가 아니다. 응답해 주시는 분의 ‘신실’, ‘의로우심’을 의지하는 것이 기도이고 나침반의 예처럼 진북을 가리키는 바늘에 본체를 맞추는 과정이다.

그래야 방향을 알게 된다. 2절에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진실과 의로우심’에 내가 합한가를 알기 때문에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간구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신실, ‘의로우심’ 때문이고 기도자는 그래서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그러한 뜻으로 충만한 상태인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의 단계로 이어진다. 반면 우리의 기도가 ‘살려 주시기만 하면’ 이나, ‘건져 주세요’라고 할 때 ‘무엇으로부터’, ‘건져야 할 이유가’ 불분명한 비는 행위에 멈추는 것이다. 시편 기도자는 그래서 ‘원수’를 특정할 수 있다. 기준이 하나님의 진실과 의로우심이 되고 기도자는 방향을 알고 기준에서 벗어난 악인, 원수에 의해 불의를 당하고 있고 간구할 수 있다.

‘내 기력이 약하다, 내 박동조차 멎’었다처럼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가지만 자신에 연약함 때문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원수들에 의해 좇기는 상태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기억, 돌이켜보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 일들을 깊이깊이 생각’한다는 표현은 지금 방향이 옳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미래를 보라고 하지 않고 ‘내가 너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했는지 돌아보라, 기억하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면’ 소망한다는 의미이자 믿음은 바라는 것이기에 기도의 결과는 믿음이 있는 상태의 변화이다.

광야를 걸어도 방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기도는 방향의 점검이자 믿음을 채우는 길이다. 기억은 ‘저기에 가면 목마름이 해소 된다’는 먼저 걸어간 자들의 발자국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러한가? 비는 것에 열정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기도는 더 지치게 한다. 그래서 기도자는 7절에 두려움에 빠질 것도 염려한다. 하지만 이내 8절에 ‘의지하고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놀라운 고백을 한다.

8절은 구해달라, 살려달라고 했던 응답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 믿음을 채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곧 사는 것, 원수로부터 안전한 것임을 깨닫고 말씀을 듣는 기쁨을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보여 준 변함없는 사랑을 향해 기도자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라는 진짜 고백에 도달한다. 나침반을 붙잡고 지도와 맞추자 이제 ‘내가 가야 할 길’ 이 보인다.

그렇게 인도 받은 길은 그 길이야 말로 평탄한 길(10), 인도를 받는 길이자 나를 살리시고, 모든 고난에서 내 영혼을 건(11)짐 받는 길임을 고백한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자 그런 삶을 왕, 주인의 뜻을 따르는 ‘종’이라고 낮춘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고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한다. 그렇다면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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